POST-ER: 사진이 세운 시간의 기둥들
김맑음
“사진의 주 무대는 침몰한 익숙함이다.
사진은 기억을 가로지르는 안내자다.”
도시의 시간
도시의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우선 이 시간을 경험하는 주체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주어 자리에 어떠한 대상이 위치하느냐에 따라서 시간은 다르게 감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에 오랫동안 거주한 이들, 새롭게 도시를 잠시 동안 경험하는 이들, 그리고 일정 기간 머물면서 도시를 체험하는 이들은 불가피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나 가장 마지막에 언급된, 일정 기간 도시를 체험하는 시간은 여행자의 시간과 완연한 차이가 있다.
여행자의 시간은 최소한의 시간 안에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이다. 때문에 최소한의 시간으로 일시적인 도시의 풍경을 최대한 기억하는 방향으로 구조화된다. 관광지를 위시로 한 목적지들은 여행이라는 이름 아래 기념비로 남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통은 이 기념비는 ‘사진’으로 남는다. 반면, 일정 기간 머무는 시간은 이방인으로서의 시선이 유지된 채 도시의 변화하는 시간을 주목할 수 있는 눈을 만드는 조건이 된다. 사진가인 박희자 작가 역시 베를린에서의 1년 남짓한 레지던시 기간 동안 도시 속에서 보이는 ‘사진’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기념비적인 앨범 속 사진이 아닌, 도시 자체에 스며들어 있는 사진이다. 19세기 초 니엡스가 찍은 최초의 헬리오그래피 사진이 8시간의 장노출로 도시를 담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제 도시 곳곳의 표면이 사진-이미지로 뒤덮여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개인의 맥락에서 사진 촬영과 생산이 한정된 사진관에서 기념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에서 디지털 기기와 함께 이제 누구나 사진-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게 변화한 점이 있을 것이다. 또한 도시의 맥락에서 상업 구조로 인해 온오프라인에서 사진-이미지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도시 속에서 노출되기 시작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이때 각자의 사진이 경험하는 시간 역시 다르다. 〈포트스-이알 POST-ER〉 연작은 이러한 도시의 시간 흐름 위에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머물렀던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은 어떠한 곳이었는가. 베를린 자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 부분 파괴된 후 도시 재건의 과정이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 도시 구역의 짧은 역사는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전쟁 이후부터 근래까지 독일 외 국가의 난민과 노동자가 유입되었고, 이후 68운동을 기점으로 예술가도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다양한 인종과 관점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으로 인해서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이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포함된 사실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1 베를린에 자리를 잡기 전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 시간이 흘러가지 않고 각자의 삶의 방식에 녹아들어 있기에, 이 사람에서 기인한 다양한 시간은 구역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크게는 길거리에서 보이는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점에서부터 작게는 어떠한 목적성을 띠고 붙여지는 포스터까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곳의 시간은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개념적으로 일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들이 겹쳐져서 방향성을 수렴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판대를 지지체로 삼은 <Kiosk Berlin>(2022)은 신문과 광고와 같은 소식들이 물리적으로 더해지는 도시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작가가 경험한 도시의 시간은 이질적인 것들이 얽혀 있는 패치워크의 모양을 닮아 있다.
포스터의 시간
도시의 시간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패치워크에 대한 인상을 바로 생각해 본다. 평평한 지지체에서 하나하나의 요소가 모자이크 방식으로 모여 있는 형태가 떠오른다. 그것은 전통적인 앨범의 모습이며, 앨범을 하나씩 넘기면서 지나가는 과거들이다. 물론 여기에 절대적인 시간과 계절의 변화도 있음을 기억하지만, 잠시 도시를 새로이 독해하는 자에게는 절대적인 시간의 변화 외에도 좀 더 작은 단위로 표면화되는 시간이 보일 것이다. 사진가의 눈에 그것은 도시에 부착되는 포스터였다.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만큼, 가판대의 뉴스 헤드라인만큼이나 이미지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작가의 기록에 따르면, 2022년에 진행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쿠르드족의 데모와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이민자들의 항의, 페미니즘, 다양성 존중과 같은 내용들이 포스터로 존재하였다. 이는 텍스트와 같은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형태로 구현되기 때문에 또 다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번역의 의미를 수반하기 때문에, 독해까지 일정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의 경우 문화적인 맥락 외에도 즉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론적인 횡단이 가능하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조합하거나 하나의 이미지에 방점을 두는 포스터는 이러한 횡단적 힘을 활용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크로이츠베르크 구역에 여러 관점이 공존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구역 하나의 포스터가 다른 포스터로 대체되는 시간이 더 짧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 도시적 장소에서 각자의 목소리는 순차적으로 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스터의 시간은 전통적인 사진 앨범의 시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도시 위에서 포스터 이미지는 겹쳐지고, 서로 영향을 주면서, 정확하게는 서로를 찢거나 밀어내면서 쌓인다. 이는 롤랑 바르트의 푼크툼과 스투디움 개념에 기댄다면 이미지의 입장에서 유토피아적인 상황은 분명히 아니다. 각각의 이미지는 독립적인 감상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푼크툼을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포스터의 시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POST-ER〉 연작은 단순히 여러 장의 사진 묶음을 앨범처럼 바라보는 개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포스터의 시간을 목격한 이후 작가가 그 시간의 순환 주기에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기꺼이 더하면서 이루어지는 실험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post(er) image〉에서 작가는 공개된 적 없는 10년 전 작업 10점을 포스터로 제작하고 그 포스터의 시간에 직접 합류한다. 베를린 코티지역 근처 여덟 장소에 이미지를 추가한 것이다. 이곳은 당시 작가의 회고로는 아침의 포스터가 저녁에 바뀌기까지 하는, 어떻게 보면 인스타그램을 연상하게 하는 장소였다. 과거 사진이 필름을 기반으로 할 때 앨범에 아카이브되고, 가장 이상적인 사진을 셀렉하는 등의 수렴하는 방식은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이미지 촬영이 대중화되고, 앨범을 공유하는 것도 쉬워지면서 이미지 포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도시 속에 포스터가 만들어지고 부착되고 추가되는 과정은 우리에게도 작가에게도 낯설지 않다. 온라인상에서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면서, 이전의 이미지가 기억에서 탈락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가 업데이트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확한 ‘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부착한 포스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작가의 이미지가 2시간 만에 가려졌다. 이후 작가는 사진의 사라짐을 추적하면서 총 45일간의 관찰을 진행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역동성이 어떻게 이미지의 주변에서 생동하는지 발견한다. 다시 온라인상 사진 관람 인터페이스를 연결해본다면, 이 실험은 사진 각자의 아우라에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이미지 소비 체계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작가는 이미지 주변의 동적 흐름을 다시 평면의 지지체에 고정시켜 본다. 〈post(er) society〉는 포스터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착안하여 덧붙여진 포스터의 상태를 구현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포스터 지면이 겹쳐져 부착된 것이라기보다는, 도시의 다양한 관점과 그것을 둘러싼 동력이 압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45일간 작가가 본인의 사진 작업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포스터의 시간이 어떻게 쌓이는지 표면으로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때 작가의 작업은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 여기서 작가는 독일이라는 문화적인 맥락을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치환한다. 구글 이미지 번역기를 통해서 외국인으로서 이미지로 와닿았던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시위, 데모, 투쟁, 그리고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포스터들은 그 순간 이미지로서의 감상에서 벗어나 메시지 그 자체가 된다. 원래 읽지 못하는 텍스트는 이미지의 영역에 포섭되어 있는데, 그것을 독해 가능한 언어로 바꾸면서 포스터의 시간에 대한 의미를 더하고 있다. 포스터의 시간은 단순히 포스터가 겹쳐지고 대체되고 사라지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흐름과 교차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post(er) village〉는 그 흐름을 하나의 도시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스터가 도시의 곳곳에서 부착되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고, 그것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가늠하기 어려운 여러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포스터의 잔해를 조합한 뒤, 이미지 군상을 마치 도시의 마케트처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마케트인 동시에 이미지 흐름을 보여주는 지도의 역할을 한다. 포스터 이미지 시간의 흐름을 상상하게 하는 이 작업들은 도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미지의 동력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지 상기시킨다.
사진의 시간
앞서 살펴본 〈post(er) image〉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도시 속 포스터의 시간에 자신의 작업을 추가하기로 결심을 했을 때, 그 작업이 10년 전 발표를 하지 않은 작가 스스로의 작업이었다는 점이다. 사진은 이전부터 기계 장치에 필연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이 촬영된 시간과 물리적인 지지체에 출력된 시간에 차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일찍이 사진에 대해서 사진이 하나의 공간적 연속체를 제시한다고 보았다. 현실의 세밀한 디테일을 평면 위에 동시적으로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비되는 관계로 역사주의는 시간적 연속체를 제시하는 것이라 정의내리며, ‘시간의 사진’을 찍는 것이라 비유하였다. 역사주의는 일종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방대한 데이터를 만드는 것이라 보았다.2 이 공간적 연속체라는 것은 피사체가 되는 실체가 손상없이 남겨져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사진 예술의 특징과 이어진다. 역사학 역시 사진과 마찬가지로 원료를 소비하지 않고 리얼리즘을 기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연대순의 시간과 그 외의 시간 사이의 딜레마를 짚으며, 시대를 다시금 정의내린다. 시대는 “서로 다른 시간표를 갖는 여러 배열체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성좌로서, … 자기의 고유한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맥락과는 또 다른 위치를 점한다.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지만, 그에 따르면 방랑하는 유대인 아하수에로가 이 상황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고 한다. 어느 시대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기에 여러 시간을 동시에 가로지를 수 있는 존재인 아하수에로는, 서로 다른 시간들이 교차하는 역사적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3
크라카우어의 이야기에 기대어 본다면, 도시와 포스터의 시간은 연대순으로 구축되면서 일종의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존재한다. 도시 속에서 포스터는 당대의 이야기를 담고, 역사적 맥락을 담고, 정치적 충돌의 동력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사진과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하는지 떠올릴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제 온라인 접근이 어디에서나 가능하고, 온라인 상에서 사진과 이미지는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해당 작업을 하는 작가 역시 그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여실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post(er) stein〉는 이미지의 시간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아카이브 기록물의 형태는 아니다. 작가는 대신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슈톨퍼슈타인의 형태를 차용하는데, 이때 구체적인 포스터의 이미지나 혹은 실물 포스터의 뭉치를 박제하여 기념비화하지 않는다. 포스터 이미지를 구성하는 색상, 어찌 보면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 하나로도 해석할 수 있는 그것을 돌로 본뜬다. 그리고 이것을 길 바닥에 옮겨 심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도시 전체가 여러 개가 쌓인 포스터 더미라고 간주한다면,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과 도시의 시간 데이터 속에서 하나의 불현듯이 등장하는 사진의 픽셀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이 공간을 동시적으로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픽셀 하나는 어쩌면 도시 자체가 사진의 공간에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 상상하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진의 시간에 기반한 ‘시대’를 방랑하면서 사진 고유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R〉 연작의 각 작업은 순차적인 발전 단계를 표면화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도시와 포스터와 사진매체의 측면에서 담지되어 있는 시간이 교차되는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시간이 일종의 세워지는 기둥(post)의 형태라고 한다면, 그 기둥은 능동적인(er) 동력을 가진 듯하다. 말하자면, 이 연작은 거대한 도시의 시간 위에서 포스터의 시간과 사진의 시간을 각자 xyz 축으로 만들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궁극적으로 사진 이미지가 존재할 수 있을지 살펴보게 만들고 있다.
이제 사진 이미지는 끝없이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하지만 사진이 담고 있는 피사체의 기억을 담고 있는, 이민을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점차 빠르게 스트리밍되는 도시 속에서 이미지 각자 서로로 인해 침몰하고 있다. 사실 그것은 동시대 사진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숙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진가의 고민은 하나로 수렴될 수 있다. 이미지의 포화 속 침몰하는 사진 이미지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POST-ER〉는 우리에게 제안한다. 견고하게 세운(post) 사진의 시간을 독해하고, 앞으로 나아갈(post) 사진의 시간을 꿈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