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
글. 박희자 


이 프로젝트는 10년 전 촬영하고 미공개로 남겨두었던 사진 10점을 대형 포스터로 인화해,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Kreuzberg)의 길거리 8곳 벽면에 부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베를린 도심의 포스터 사이에 나의 이미지를 개입시키고, 그것이 도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소멸해 가는지를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진(이미지)의 의미를 재고하고자 했다. 한 장의 사진은 수많은 도시의 손길에 의해 형태를 바꾸며 사라졌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품어갔다. 사진-이미지가 겪은 45일간의 여정은 사진의 물리성, 기록과 오역, 그리고 이미지의 공동창작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미지와 기술, 해석의 위기
이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시각 경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열차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끊임없이 제공되는 시각 요소들로 인해 하나의 장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무엇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더라도 곧 가까운 물체나 나무, 건물과 같은 구조물이 등장해 막 보았던 장면은 어느새 시야 밖으로 밀려나며, 연속적인 이미지 흐름 속에 사라진다. 이런 방해 요소가 없더라도, 대상 전체는 곧 기차 뒤에 따라오는 시각의 진공(vacuum)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모든 풍경을 온전히 다 보기 위해서는 더 빠른 속도로 눈 운동을 하면 되는 것일까?

흐르는 풍경과 이미지 

문제는 이미지의 연속성만이 아니었다. 달리는 기차에 실린 몸은 그 어떤 결정권도 없기에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주체성 또한 잃게 되었다. 대상을 깊이 관찰하고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의 표면을 스치며 흘러가는, 표층에 머무는 현대 시각환경, 파노라마적 시각경험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될 것 아닌가? 1878년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사진은 사람의 눈이 찰나를 포착하고 인지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사진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첫 시도였다. 그리고 지난 100여년간 사진은 현실을 복제하여 신체적 한계로 인해, 인식적 한계로 인해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볼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여전히 나에게 현대 도시의 시각 환경은 200여년 전 그 파노라마적 감각을 연상시킨다. 가만히 있어도 교체되고 중첩되는 이미지는 화면을 통해 끊임없이 나에게 도달하고, 하나의 이미지가 의미를 획득하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응시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본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변화의 상태에서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여, 인간의 눈과 의식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대상을 인식하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도시의 스펙터클과 복제 이미지들은 기능보다 화려함을 우선하며, 이내 감상자는 그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를 부유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했던 파노라마적 시각에 시간성과 속도가 더해진 현대 미디어 환경은, 경계 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시각에 대한 욕망을 보여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만들었다. 이제 사진은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사진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부 보려하는 욕망 혹은 보고 있다는 착각

포스터 : 네 개의 프레임 
사진가이자 이론가 빅터 버긴(Victor Burgin)은 파노라마를 단순히 총체적 시야로 이해하기보다는, 여러 이질적 요소와 다른 시공간이 관람자의 응시 앞에 통합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버긴의 이 관점을 도시 속 이미지의 공간에서 재확인해 보고자 10년 전 촬영하고 미공개로 남겨두었던 사진 10점을 대형 포스터로 인화해,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Kreuzberg)의 길거리 8곳 벽면에 부착하고 그것을 둘러싼 변화들을 기록했다. 거리에 포스터가 쌓이는 장소를 서로 다른 시간과 의도, 주체가 중첩되는 물리적인 장(場), 즉 파노라마적 공간으로 보고 나의 이미지를 개입시킴으로서, 이미지를 고정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과물이 아닌 도시의 흐름 속에 놓인 사건으로 위치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나의 사진 10점은 중첩, 훼손, 제거, 덧붙임 등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과 우연에 의해 변화되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붙인 포스터는 2시간 만에 다른 포스터에 가려졌고, 일주일 후에는 나의 포스터 위로 터키 정부를 향한 시위를 예고하는 쿠르드 사람들의 데모 전단에 대해 항의하던 행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또 한 주 뒤에는 나의 포스터에 낙서를 하고 있던 10대 청소년들을 목도하고, 40여 일 뒤에는 마지막 남아있던 포스터에 누군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그려 넣자, 다음날 그 포스터마저 찢긴 채 발견되었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내걸린 나의 이미지는 시민들의 게시판이자 낙서와 찢긴 자국의 캔버스로 변모해갔고, 조각으로 남아있던 포스터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기까지 45일이 걸렸다.

멜팅라라 Melting rah-rah 2022 

포스터는 수많은 개인의 의도와 감정이 겹겹이 쌓인 응축된 시간이자 기억을 담은 층위의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간섭들은 이미지가 전시장 밖 공공장소에서 현실의 일부로 기능하게 만드는 요소였고, 나는 더 이상 이미지의 절대적 소유자가 아니었다. 이에 나는 포스터를 붙인지 11일째가 되던 날, 나는 사진가로서의 역할을 이미지 창작자에서 이미지의 순환구조를 제안하는 매개자로 조정했다. 그리고 하나의 물리적 장 위에 겹쳐진 서로 다른 시간과 존재들이 지시하는 곳을 따라가 사진가로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페미니즘 시위, 각 국가와 민족의 현안을 알리는 집회, 에너지, 전기 등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안들의 개선 촉구 등 도시가 발화하는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조직된 집단의 목소리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주변에는 노숙자나 실업자처럼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불법 이주 노동자, 개인적인 억울함을 안고 있는 이들, 소수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환경 문제나 전쟁 난민 반대주장 등 거대한 정치적 담론과 개인의 생존, 집단의 요구와 고립된 개인의 상태 등 다층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들을 마주하며, 나에게 포스터 공간은 중첩된 도시의 메세지들이 뒤엉킨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서로 다른 맥락과 정보에 동시다발적으로 노출되는 동시대 시각 환경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이미지 포화의 시대, 모든 것을 보고있는 듯 하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지금,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읽기를 꿰메어 작동시키는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사진가의 역할이 이동하고 있었다.
45일간 겹겹이 붙었던 포스터들은 그 기간 베를린 도시에서 벌어진 모든 수많은 일들의 축적이었다. 쌓이고 쌓이다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또는 도로 환경 정비를 위해 강제로 제거되어 결국 하나의 커다란 종이 덩어리로 남았다. 나는 나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는 이 포스터 덩어리를 수거해, 포스터가 붙어 있던 지점을 넘어 도시 전체의 맥락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프랑스 기술철학자 자크엘륄에 따르면 도시는 기술로 만들어졌고, 시각 이미지의 결합으로 채워진 새로운 공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터는 도시의 순환을 ‘현실-이미지-현실’로 담아내는 물리적인 장이었다. 이에 나는 포스터 덩어리들을 재료로 삼아, 도시가 발전하는 과정의 기술을 전시하는 베를린 테크닉 뮤지엄(Deutsches Technikmuseum)에 전시된 도시 구조물을 모티브로 작은 도시 입체구조물을 만들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했다. 현실의 도시를 모사한 모델을 통해 도시를 다시 이미지로 치환하고, 포스터 조각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일시적으로 고정하려는 시도였다. 그 자체로는 불완전할 테지만, 사진으로 촬영하여 그 형태를 고정시킴으로서 도시에서 무엇이 남고 사라질 지, 지금 우리 사회와 도시는 견고한지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후 이 구조물의 원본은 다시 5x5cm의 크기로 잘라 클램프로 고정되었다.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을 담았던 포스터는 고작 15센치 높이로 압축되었다. 마치 지난 수십년간 찍은 사진들이 손바닥크기의 외장하드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작업을 거리의 이미지 더미에 포함시키고, 이미지의 지시를 따라 사회를 구경하고, 그 이미지로 다시 도시를 만들고, 이를 다시 물리적으로 해체해보니 구 수많은 일들이 고작 한 손에 잡힐 만한 크기로 남았다. 나는 사라진 나의 이미지들을 이곳의 방식으로 보내주고자 했다. 이것은 사라진 포스터를 기리기 위한 의식과도 같은 과정이었다. 포스터가 사라진 자리의 길거리 보도 블럭용 돌을 캐스팅하여 포스터에 있던 색을 입힌 바닥돌을 박아두었는데, 이는 마치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처럼,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를 지시하는 기억의 장치로 기능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제 그 자리 남아있는 것은 작은 돌조각 하나 뿐이지만, 그것은 이 프로젝트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기억과 기록의 문제, 사라진 이미지를 상징하는 마지막 표식이 되었다.
공동저자로서의 이미지 공간: 시각장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예술사가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다양한 인쇄매체의 갖가지 이미지를 연관된 것들끼리 하나의 판에 모은 이미지 지형도 <므네모시네>를 통해 이미지가 기억의 매개로서 시대적 맥락에서 능동적으로 읽힐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미지가 기억을 매개함으로서 구성에 따라 메시지가 변화되는 매체라는 점에 집중, 이미지 중심적 사유를 통해 언어의 보조 수단으로 여겨져 오던 이미지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다. 이 구성은 세계화와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문화를 수용하는 데 시공간적 경계가 희미해진 오늘날의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과도 상동 관계에 있다.
 작업을 진행한 지 2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그 사진들을 꺼내 들었다. 포스터 더미를 촬영한 이미지 속, 사람의 손에 의해 찢겨 뒷면이 드러나거나 흔적만 남은 빈 지점에 또 다른 사회적 장면을 덧입혀 <시각장 Visual Filed> 작업으로 이어갔다. 파편화 된 포스터 위에 덧입혀진 장면들은 결손에 중첩되는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서사가 생성되었고, 이를 통해 동시대 이미지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전쟁이나 쿠르드사람들의 저항처럼 거대한 정치적 질서를 환기시키는 이미지와, 현장의 구체적 목소리를 담은 장면들이 한 표면 위에 겹쳐지면서, 개인의 투쟁이 다시 세계 질서 속으로 흡수되는 모순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Co-creation Nr 02 2025

독일의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2022

이미지를 창조하는 예술가는 기억의 재현 혹은 저장을 담당할 뿐 만 아니라 재창조자이기도 하다. 결국 <므네모시네>는 이미지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여기에서 이미지의 사명과 운명이 동시에 읽히는 것 같다. 이처럼 어긋나고 중첩되고 오해하는 과정 또한 이미지 소통의 중요한 본질일 것이다. 이에 나는 정치적 시위문구와 소비재 광고, 낙서와 유머러스한 스티커가 한 표면에 공존하는 장면을 구글번역기를 통해 해석하는 실험을 시도했다. 오역의 상태가 이미지와 언어가 항상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유통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환기하고자 한 것이다. 예상대로 서로 다른 언어와 맥락의 문구들은 번역을 거치며 대부분 의미가 어긋나고 중첩되며 불완전하게 전달되었지만, 본질을 꿰뚫는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바르부르크는 이미지 안에는 집단의 기억이 파토스형식으로 내제되어 있다가 파편적으로 되살아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번역의 실패와 왜곡 역시 그 기억이 다시 활성화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이미지는 짧은 동영상이 되어 끊임없이 재생되고, 무한히 복제되는 구조 속에 그 표면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 감상자의 응시를 단일한 초점으로 고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출처를 추적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무수히 분해되고 재조합되며, 원본과 복제, 기록과 생성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이 작업에서도 한 장의 사진이 거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간섭을 통해 동시대 사회의 단편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포스터 위에서 발생하는 훼손과 중첩, 제거와 덧붙임의 과정은 빅터 버긴이 말한 파노라마 개념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이질적인 응시들이 축적되며 작동하는 구조로서 작동했다. 애초의 의도와 무관했던 도시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고, 나는 이를 단순한 변화가 아닌 도시가 참여한 공동창작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미지는 더 이상 작가 1인의 산물이 아니며, 잃어버린 통제 속에서도 작품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성장하고 확장되었다. 과거의 사진 예술이 사진가의 시선에 집중했었다면, 지금은 한 장의 이미지에 대한 단일한 해석이 아닌 병렬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이미지 중심적 사유가 강화된 시대에, 언어적 재현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이미지로 다시 새겨보려는 시도였다.  
작업 <POST-ER>은 사진가가 플랫폼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구성되는 이야기를 수습하고 해석하는 매개자로서 기능케 했다. <POST-ER>, 45일간 베를린의 길거리에서 펼쳐진 이미지의 생로병사 여정 또한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과 개입의 연속이었다. 사진을 ‘종이 위의 재현’으로 되돌리고, 그 사진이 다시 도시의 흐름과 충돌하면서 사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진이라는 언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나의의 무모한 시도들이, 도시 위에 놓인 이미지, 기술로 복제된 시선, 사회적 사건과 우연의 충돌, 그리고 다시 사진으로 재구성된 세계로 이어졌다. 이미지의 순환이자, 감상의 회복이며, 사진이 여전히 유효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 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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