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
글. 박희자 


이 프로젝트는 10년 전 촬영하고 미공개로 남겨두었던 사진 10점을 대형 포스터로 인화해,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Kreuzberg)의 길거리 8곳 벽면에 부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베를린 도심의 포스터 사이에 나의 이미지를 개입시키고, 그것이 도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소멸해 가는지를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진(이미지)의 의미를 재고하고자 했다. 한 장의 사진은 수많은 도시의 손길에 의해 형태를 바꾸며 사라졌고, 처음의 의도와는 다른 이야기들을 품어갔다. 사진-이미지가 겪은 45일간의 여정은 사진의 물리성, 기록과 오역, 그리고 이미지의 공동창작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이미지와 기술, 해석의 위기
모빌리티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시각 경험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열차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끊임없이 제공되는 시각 요소들로 인해 하나의 장면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무엇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더라도 곧 가까운 물체나 나무, 건물과 같은 구조물이 등장해 막 보았던 장면은 어느새 시야 밖으로 밀려나며, 연속적인 이미지 흐름 속에 사라진다. 위에서의 언급처럼 방해 요소가 없더라도, 대상 전체는 곧 기차 뒤에 따라오는 시각의 진공(vacuum)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린다. 그렇다면 모든 풍경을 온전히 다 보기 위해더 빠른 속도로 눈 운동을 해야 할까? 그런데 문제는 이미지의 연속성만이 아니었다. 달리는 기차에 실린 몸은 그 어떤 결정권도 없기에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주체성 또한 잃게 되었다. 대상을 깊이 관찰하고 분석하기보다는 그것의 표면을 스치며 흘러가는, 표층에 머무는 파노라마적 시각경험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흐르는 풍경과 이미지 

그렇다면 기술 발전을 통해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될 것 아닌가? 1839년 사진의 발명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듯 보였다.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촬영해 사람의 눈이 찰나를 포착하고 인지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증명한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시도 이후, 지난 100여년간 사진은 현실을 복제하여 신체적 한계로 인해, 인식적 한계로 인해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볼 수 있게 했다.  ​​​​​​​
그런데 나에게 현대 도시의 시각 환경은 200여년 전 그 파노라마적 감각을 연상시킨다. 가만히 있어도 교체되고 중첩되는 이미지는 화면을 통해 끊임없이 나에게 도달하고, 하나의 이미지가 의미를 획득하기까지 필요한 시간과 응시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본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변화의 상태에서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여, 인간의 눈과 의식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대상을 드러내는 시도이다. 그런데 도시의 스펙터클과 복제 이미지들은 기능보다 화려함을 우선하며, 이내 감상자는 그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를 부유하게 된다. 총체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했던 파노라마적 시각에 시간성과 속도가 더해진 현대 미디어 환경은, 경계 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시각에 대한 욕망을 보여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만들었다. 이제 사진은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사진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

 전부 보려하는 욕망 혹은 보고 있다는 착각

포스터 : 네 개의 프레임 
<POST-ER>는 총 네 개의 상호 연결된 시리즈로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공통된 접두어인 <post(er) - >를 통해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점진적으로 연결된다. 
가장 먼저 진행된 <post(er)image>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의 길거리 8곳 벽면에 부착한 나의 사진 10점이 사라지기까지 45일 동안의 물리적 변화에 대한 기록이다. 사진가이자 이론가 빅터 버긴(Victor Burgin)은 파노라마를 단순히 총체적 시야로 이해하기보다는, 여러 이질적 요소와 다른 시공간이 관람자의 응시 앞에 통합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버긴의 이 관점을 도시 속 이미지의 공간에서 재확인 해보고자 했다. 거리에 포스터가 쌓이는 장소를 다른 시간과 의도, 주체가 중첩되는 물리적인 장(場), 즉 파노라마적 공간으로 보고 나의 이미지를 개입시킴으로서, 이미지를 고정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결과물이 아닌 도시의 흐름 속에 놓인 사건으로 위치시키고자 했다. ​​​​​​​
거리에 놓인 나의 이미지들은 중첩, 훼손, 제거, 덧붙임 등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과 우연에 의해 변화되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붙인 포스터는 2시간 만에 다른 포스터에 가려졌고, 일주일 후에는 나의 포스터 위로 터키정부를 향한 시위를 예고하는 쿠르드사람들의 데모 전단에 대해 항의하던 행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또 한 주 뒤에는 나의 포스에 낙서를 하고있던 10대 청소년들을  목도하고, 40여일 뒤에는 마지막 남아있던 포스터에 누군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그려 넣자, 다음날 그 포스터마저 찢긴 채 발견되었다.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내걸린 나의 이미지는 시민들의 게시판이자 낙서와 찢긴 자국의 캔버스로 변모해갔다.  ​​​​​​​ ​​​​​​​

멜팅라라 Melting rah-rah 2022 

나는 이 상황이 이미지가 전시장 밖 공공장소에서 현실의 일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미지의 절대적 소유자가 아니었기에 사진가로서의 역할을 이미지 창작자에서 이미지의 순환구조를 제안하는 매개자로 조정했다. 그리고 나의 이미지 위 하나의 물리적 장 위에 겹쳐진 서로 다른 시간과 존재들이 지시하는 곳을 사진가로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포스터 위 전단을 따라간 곳에서 마주한 페미니즘 시위, 각 국가와 민족의 현안을 알리는 집회, 에너지, 전기와 같이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안들의 개선 촉구 등 도시가 발화하는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엔 조직된 집단의 목소리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주변에는 노숙자나 실업자처럼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불법 이주 노동자, 개인적인 억울함을 안고 있는 이들, 소수의 목소리로 전달되는 환경 문제나 전쟁 난민 반대주장 등 거대한 정치적 담론과 개인의 생존, 집단의 요구와 고립된 개인의 상태 등 다층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post(er)society> 사진들로 인해 이제 나에게 포스터 공간은 중첩된 도시의 메세지들이 뒤엉킨 장소가 되었는데, 이는 마치 서로 다른 맥락과 정보에 동시다발적으로 노출되는 동시대 시각 환경의 축소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미지 포화의 시대, 모든 것을 보고있는 듯 하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지금, 사진은 더 이상 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읽기를 꿰메놓음으로서 그것이 작동하는 무대인 셈 이었다. 사진가의 역할이, 그 자리가 이동하고 있었다. 
45일째가 되던날 나는 더 이상 내 이미지의 작은 조각 조차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엔 다른 이미지들에 덮인 커다란 종리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45일 간 겹겹이 붙었던 포스터들은 그 기간 베를린 도시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축적이었다. 쌓이고 쌓이다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도로환경정비를 위해 강제로 제거되어 커다란 종이 덩어리로 남았다. 나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을 이 포스터 덩어리를 수거해 또 다른 형태로 그 변형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post(er)village>에서는 나의 시선을 이미지가 붙어 있던 도시 전체의 맥락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프랑스 기술철학자 자크 엘륄이 말했듯이, 도시는 기술로 만들어졌고, 시각 이미지의 결합으로 채워진 새로운 공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터는 도시의 순환을 ‘현실-이미지-현실’로 담아내는 물리적인 장이었다. 이에 나는 포스터 덩어리들을 이용해 도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기술을 전시하는 베를린 테크닉 뮤지엄(Deutsches Technikmuseum)에 전시된 도시 구조물을 모티브로 작은 도시 입체물을 만들었다. 운하, 배, 집, 노천극장, 집성촌 등 도시의 모사한 모델, 즉 도시를 다시 이미지로 치환하고자 한 시도였다. 포스터-조각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지만 사진으로 촬영하여 그 형태를 고정시키고자 했다. 도시에서 무엇이 남고 사라질 지, 지금 우리 사회와 도시는 견고한지 묻고자 하는 시도였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 나는 다시 이 포스터-조각을 해체해 5x5cm의 작은 사이즈로 잘라 클램프로 고정하였는데,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을 담았던 포스터이지만 고작 15센치 높이로 압축되었다. 마치 지난 수십년간 찍은 사진들이 손바닥크기의 외장하드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포스터는 45일만에 사라졌다. 사라진 나의 이미지들을 이곳의 방식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작업의 마지막 단계 <post(er)stein>은 사라진 포스터를 기리기 위한 의식과 같은 과정이었다. 포스터가 사라진 자리의 길거리 보도 블럭용 돌을 캐스팅하여 포스터에 있던 색을 입힌 바닥돌을 박아두었는데, 이는 마치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처럼, 무언가가 사라진 자리를 지시하는 기억의 장치로 기능하길 바랬다. 사라진 사진의 자리에는 이제 작은 돌조각만이 박혀 있을 뿐이지만, 사라진 이미지의 마지막 흔적이며, 결국 이 프로젝트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한 기억과 기록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맺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공동저자로서의 이미지 공간: 시각장
이 작업에서 한 장의 사진은 거리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간섭을 통해 동시대 사회의 단편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포스터 위에서 발생하는 훼손과 중첩, 제거와 덧붙임의 과정은 빅터 버긴이 말한 파노라마 개념처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이질적인 응시들이 축적되며 작동하는 구조로서 작동했다. 애초의 의도와 무관했던 도시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고, 나는 이를 단순한 변화가 아닌 도시가 참여한 공동창작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은 더 이상 작가 1인의 산물이 아니며, 잃어버린 통제 속에서도 작품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성장하고 확장되었다. 
과거의 사진 예술이 사진가의 시선과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면, 사진가가 플랫폼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구성되는 이야기를 수습하고 해석하는 매개자로서 기능케 했다. 동시대 이미지의 물리적, 심리적 환경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는 한 장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 아닌 병렬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구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Co-creation Nr 02 2025

독일의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2022

작업을 진행한 지 2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그 사진들을 꺼내 들었다. 포스터 더미를 촬영한 이미지 속, 사람의 손에 의해 찢겨 뒷면이 드러나거나 흔적만 남은 빈 지점에 또 다른 사회적 장면을 합성하여 <시각장 Visual Filed>이라는 작업으로 이어갔다. 파편화된 포스터 위에 덧입혀진 장면들은 중첩과 결손, 재배치를 통해 새로운 서사가 생성되었고, 나는 이를 통해 동시대 이미지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가시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이나 쿠르드사람들의 저항처럼 거대한 정치적 질서를 환기시키는 이미지와, 현장의 구체적 목소리를 담은 장면들이 한 표면 위에 겹쳐지면서, 개인의 투쟁이 다시 세계 질서 속으로 흡수되는 모순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어긋나고 중첩되고 오해하는 과정 또한 이미지 소통의 중요한 본질이라는 생각에 정치적 시위문구와 소비재 광고, 낙서와 유머러스한 스티커가 한 표면에 공존하는 장면에 ㅐ해 구글번역기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오역의 상태가 이미지와 언어가 항상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유통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키고자 한 시도였다. 예상대로 서로 다른 언어와 맥락을 가진 문구들은 번역을 거치며 대부분 의미가 어긋나고 중첩되며 불완전하게 전달되었지만, 본질을 꿰뚫는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
오늘날 이미지들은 짧은 동영상이 되어 끊임없이 재생되고, 무한히 복제되는 구조 속에 그 표면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 감상자의 응시를 단일한 초점으로 고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출처를 추적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무수히 분해되고 재조합되며, 원본과 복제, 기록과 생성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POST-ER>, 45일간 베를린의 길거리에서 펼쳐진 이미지의 생로병사 여정 또한 예측 불가능한 우연성과 개입의 연속이었다. 사진을 ‘종이 위의 재현’으로 되돌리고, 그 사진이 다시 도시의 흐름과 충돌하면서 사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사진이라는 언어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나의의 무모한 시도들이, 도시 위에 놓인 이미지, 기술로 복제된 시선, 사회적 사건과 우연의 충돌, 그리고 다시 사진으로 재구성된 세계. 이것이야말로 이미지의 순환이자, 감상의 회복이며, 사진이 여전히 유효한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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