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자의 《한 장의 땅: 소멸하는 물질 이동하는 의미(A sheet of Land: Vanishing Matter Shifting Meaning)》에 대해
미술비평 ㅣ 최영건
지질학(geology)은 땅을 이루는 물질과 구조, 그리고 그것이 겪어온 시간의 역사를 다루는 과학이다. 땅은 흔히 지표면으로 감각되지만, 지구의 가장 안쪽까지를 포괄한다. 지질학은 그런 땅의 유기물계와 무기물계에 어떤 연속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 변인과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유시 파리카에 따르면 지구는 인간이 남긴 발자국을 간직하는 아카이브다.[1] 땅은 그 가장 바깥쪽인 지표면으로부터 안쪽으로 층층이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시간의 흐름에 따른 흔적을 축적한다.
박희자의 사진 작업은 사진이라는 미디어가 기록 및 보존과 맺고 있는 관계를, 지표면이라는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기록의 미디어와 교차시킨다. 지표면은 개인의 통제력을 아득히 초월하고는 하는 자기법칙의 미디어다. 매일의 조수간만을 근원적으로 뒤바꿀 수는 없듯, 지표면이 거기 속한 모든 것에 영향을 가하는 일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 더 빨리 썩어 없어지게 할 수도 영영 썩거나 매장되지 않고 거기서 보존되게 할 수도 없다. 지표면은 비/유기체의 행위를 언제나 자기의 방식으로 기록한다. 이 기록은 불멸하는 보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형을 위한 것이다.
박희자의 〈쓰여진 땅(Written Land)〉는 땅을 사진 찍는 사람과 카메라의 행위에서 출발한다. “2025년 3월 4일 나는 제주 덕천리에 디지털 카메라의 촬상소자 비율만큼의 땅(3.3x4.4m)을 확보하고, 그 ‘땅’을 촬영한 이미지를 실물 크기로 출력해 다시 현장에 되돌려 놓았다.”[2] 땅을 찍은 사진들은 그 찍힌 땅 위에 놓여 돌로 고정되었다. 지표면에 그것을 불완전하게 복제해 재현한 문서가 밀착되었다. 땅의 사진은 땅의 확장된 몸(expanded body)이다. 땅에 대한 아카이빙이 땅이라는 아카이브에 놓이며 그것과 뒤섞일 때, 과연 땅의 경계는 어디까지로 정의되어야 할까.
카메라가 사진 찍을 때, 그 사진은 땅에 대한 인간-기계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사진이 땅 위에 놓여 땅의 일부가 될 때 작업은 일방향이 아닌 양방향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땅에 대한 사진의 아카이빙이자, 땅에 의한 사진의 아카이빙이다. 박희자의 탐구는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움직임이 서로에게 접속하는 중층성을 가시화한다. 1년이 넘는 시간은 그 가시화를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땅은 사진을, 사진은 땅을 아카이빙한다. 이 아카이빙은 어느 쪽도 있는 그대로의 보존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
사진은 3차원 리얼리티의 땅을 평면화해 인쇄 용지라는 사물성으로 변주한다. 땅은 사진을 서서히 흙으로 뒤덮는다. 사진은 분해되고 매립되며 땅이라는 행위자의 아카이빙 방식을 따라 지질학적 의미에서의 아카이브의 일부가 된다. 박희자는 땅과 사진이 서로에게 행위하는 양방향의 아카이빙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전시 《한 장의 땅》은 〈쓰여진 땅〉이라는 땅 위의 땅 사진 그 자체와, 그 사진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흔적, 사진이 아닌 사진이라는 사물의 부재에 대한 기록을 포괄한다. 〈쓰여진 땅〉에서 출발해 그것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것은 세 가지 움직임이다. 땅과 사진,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얽혀 든다.
박희자의 사진 작업은 사진 찍기를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인간의 아카이빙으로 설정하는 대신, 사진 찍기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연결이자 연계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전시는 땅과 사진, 사람이 연계해 가시화한 기록이다. 박희자는 땅과 사진이 서로에게 해 보이는 일에 최소한으로 개입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진 작업이지만, 작가가 이 사진이라는 미디어에 개입하는 방식은 평면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평면의 물성 자체를 변주하는 것이다. 《한 장의 땅》에서 땅은 사진을 분해하여 자기와 뒤섞으며 그를 아카이빙한다. 사진은 땅을 평면화하여 그것을 복제, 이동시키는 문서인 동시에 땅에 섞여 들어가는 땅의 일부다. 바로 이 다면성이 박희자의 변주가 정교하게 작동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용지에 대한 섬세한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박희자는 사진에 대한 땅의 행위를 관찰하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사진 용지를 변경했다. 처음에 땅 사진은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방식으로, 중성 종이(archival paper)에 출력되었다. 코팅되지 않은 이 종이는 땅에 놓였을 때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완전히 분해되어 버린다. 박희자는 분해되어 부재화되기 전의 사진이 가진 물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중성 종이가 아닌 레진 코팅 종이(resin coated paper)로 인화 용지를 변경한다. 중성 종이가 주로 전문적인 사진 작품에 사용되는 용지라면, 레진 코팅 종이는 보다 일상적인 용도로 쓰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의도적으로 레진 코팅 종이로 용지를 변경하며, 사진이란 프린트된 내용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사물로서의 물성을 지니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면화한다.
시간이 흐르며 완전히 분해되었던 중성 종이와 달리 레진 코팅 종이는 5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중간 점검을 위해 5개월 14일 만에 땅에서 떼어내진 사진은 처음과 전혀 다른 사물이 되었다. 본래 무엇을 찍은 것인지 알아보기 힘든, 구멍 뚫리고 구겨진 사물이다. 이 사물은 여전히 사진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일반적으로 부여하는 사진의 쓰임새를 전혀 해 보이지 않는다. 1년 1개월이 지난 2026년 7월, 박희자는 자신이 땅에서 수거해 온 사진의 남은 잔해를 하나하나 조심스레 복원해 본다. 박희자의 설계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소실을 향한 애도와 체념은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는 다만 땅과 사진의 관계를 기록한다. 그들은 이제 뒤섞였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사진이고, 한편으로는 이제 땅이다.
5개월 14일 뒤 땅에서 분리되었던 것이 비교적 사진의 흔적을 지녔다면, 1년 1개월이 지나 남은 파편은 사진이 아닌 흙 부스러기처럼 보인다. 땅에 의해 아카이빙된 사진은 이제 땅의 일부 같다. 모든 게 달라졌다. 박희자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자문이 쓰여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에 나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3] 이 물음에 담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순간’은 이 작업이 기록하고 있는 모든 순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 세상에 그런 순간이란 결코 없다는 감각을 겨눈다. 인간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는 순간에도 모든 것이 ‘쓰이고’ 있다. 이 글쓰기는 인간의 언어 기호 체계가 아닌 저마다의 사물의 행위로 이루어진다.
비키 커비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Il n'y a pas de hors-texte)’는 데리다의 말을 전유해, 모든 비/유기체가 매 순간 자신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써 내려가고 있다고 말했다.[4] 텍스트의 의미를 이러한 관점으로 확장할 때, 글쓰기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을 직조하는 움직임을 가리키는 부름이 된다. 땅은 땅의 방식으로 그것의 텍스트를 써내려간다. 인간은 사진을 찍어 땅을 문서화(documentation)했고, 〈쓰여진 땅(Written Land)〉이라 이름 붙여진 사진은 땅과 사진이 써내려간 텍스트가 되었다. 그로써 그것은 인간이 부여한 사진의 용도로 환원될 수 없는 사물이 되었다.
박희자는 땅과 놓아둔 사진을 보러 가서, 그녀가 보고자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았다고 했다. 흙 속으로 녹아 내리듯 섞여 들어간 사진 위에 꽃이 피어 있었다. 어느 사진에는 개미 굴이 있었다. 미처 다 분해되지 않은 종이에 개미들이 구멍을 뚫어 그곳에 집을 지었다. 사진은 사진이자, 개미의 집이며, 흙 부스러기가 되었다. 그 중층성은 사진이라는 사물이 발현한 사물성이다. 땅은 땅의 방식으로, 사진은 사진의 방식으로 그것의 텍스트를 써 내려 간다. 이 글쓰기는 인간이 사진에게 부여한 재현으로 대표되는 용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진의 사물성 그 자체로서 현현한다.
땅과 땅에 대한 문서화로서의 사진이 뒤섞일 때, 흙 부스러기처럼 변한 사진은 사람의 문서이자 땅 자신이 쓴 문서다. 박희자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은 현실을 복제한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것은 작가다. 사진이 재현하는 현실은 작가와 기계의 결합에 의해 재구성된다. 그러나 박희자는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도 보여주는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작가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자신으로부터 사진을 분리해, 땅과 사진을 결합했다. 1년 동안 땅 위에 놓였던 사진은 이제 그녀가 지표면을 평면화할 때 미처 다 감각할 수 없었던 땅의 행위를 가시화한다. 이는 사진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렌즈 촬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의 탐닉이자 응답이다.
박희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평면 작업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그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뒤섞이도록 두어 왔다. 시간을 들이고 기다림 속에서 변화를 기록했다. ‘POST-ER’(2022)는 10년 전 촬영했던 10점의 사진을 대형 포스터로 인화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의 길거리 8곳 벽면에 부착하는 것에서 시작된 연작이다. 45일 동안 거리에 부착되어 있었던 포스터들에는 도시의 행위성이 고스란히 기입되었다. 빛과 비바람에 노출되어 바래고 찢겼으며, 또 다른 포스터로 가려졌고, 시위와 전쟁과 관련된 흔적이 기입되었다. ‘POST-ER’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이 사람들의 흔적이었다면, 《한 장의 땅》이 전면화하는 것은 땅과 사진의 행위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이 서로를 써 내려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라짐을 다시금 기록한다.
땅을 찍은 사진인 〈쓰여진 땅(Written Land)〉이 이 전시를 위해 수행된 첫 문서화라면, 〈덕천리 땅의 흙과 식물이 포함된 투명한 종이 형상〉은 사라진 사진에 대한 문서화다. 작가는 처음 찍은 땅의 사진을 토대로, 땅 위에서 서서히 형태가 변해 가는 사진의 중간 모습을 조형했다. 구겨진 사진 형태의 투명한 아크릴 조형물에는 작가가 땅에서 가져 온 풀과 흙이 섞여 있다. 이들은 땅 위에 사진이 놓였던 그 순간을 최대한 재현한다. 그러나 사라짐의 모든 순간은 동시에 상상적이다. 작가는 이제 분해되어 사라진 사진의 어느 순간을 상상적으로 복원했다. 투명한 아크릴은 부재에 대한 작가의 상상적 개입이자, 그녀가 사라짐에 대해 써 내려 간 문서다.
사진과 땅이 결합하는 과정에는, 땅에 놓여 있도록 사진을 누르던 돌들도 있었다. 박희자는 그 돌이 거기에 있었던 순간 또한 기록한다. 전시와 동명의 책인 『한 장의 땅: 소멸하는 물질 이동하는 의미(A sheet of Land: Vanishing Matter Shifting Meaning)』은 전시에 대한 도록이 아닌, 사라진 돌에 대한 기록 모음에 가깝다. 박희자는 돌이 땅의 사진을 누르고 있던 모습을 사진 찍어 기록했고, 돌이 그 자리로부터 이동한 후 거기 있던 돌의 윤곽을 드로잉했다. 돌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돌에 겹쳐진 풀의 기억도 필요했다. 〈남은 선(Remaining Lines)〉라 이름 붙여진 이 그림들과 함께 책으로 엮인 것은 130점의 드로잉에 대한 저마다의 작가 노트다. “Nr 009사물들을 제자리에 두고 이 세계의 질서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추적한다.”(39) “Nr 027모든 것이 메시지다. 모든 것이 텍스트다.”(42) 이런 글들과 함께 엮인 돌의 윤곽 드로잉은 미지에 대한 지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도라면 그것은 과거를 추적하기 위한 지도이자, 이제는 사라진 풍경이 문서화되고 변주되며 계속 써 내려 가는 텍스트를 예지하기 위한 지도일 것이다. 박희자는 자신의 드로잉 대부분을 주위의 작업자들에게 보냈다. 그들에게 거기에 작업을 이어 나가 주기를 부탁했다. 돌 윤곽의 드로잉이 돌과 땅이 있던 그 순간의 확장된 몸이라면, 그 순간은 이제 여러 사람들과 교차하며 변주되어 나간다.
땅이 모든 것의 아카이브라면, 이 아카이브는 사진 찍힐 수 있을까. 땅을 아카이브라는 행위성으로 해석하는 지질학의 시선은 지표면을 시각적인 데이터로 한정하지 않는다. 박희자가 사진을 시각적인 데이터의 문서로 한정하지 않으며 그 구겨지고 분해되며 땅과 겹치는 사물성을 전면화해 땅과 관계 맺는 것은, 지질학의 표현을 빌려 아카이브로서의 땅에 이 사진 작업의 초점을 맞춘다. 아카이브를 문서화한 사진이 다시금 땅에게 아카이빙되고, 그것이 다시금 문서화된다. 이 겹치는 관계들은 땅과 사진이 서로 뒤섞이듯 서로 연결되며 서로를 생성한다. 박희자가 가시화한 것은 끊임없이 서로를 써 내려 가는 이 과정의 일부분이며, 이것이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감각시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아카이빙의 숙명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매 순간 텍스트를 써 내려 간다.
작가는 그 땅에 이제는 사라진 돌이 있었던 것을 안다. 땅과 땅에 대한 재현이 서로를 아카이빙하며 뒤섞이던 풍경을 안다. 이제 그 풍경은 사라졌고, 사라짐 후에도 행위들은 변주되며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어 나간다. 이제 그것은 전시와 문서라는 형태로 변주되었다. 땅 사진은 땅의 확장으로서 전시 공간으로 이동했고, 복제되어 다시금 이동할 것이다. 전시와 문서 역시 계속 쓰여 나가는 텍스트의 일부다. 사라진 돌에 대한 드로잉이 어렴풋 지도처럼 느껴지듯이, 박희자의 작업은 다가올 미래에 분명히 무언가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지를 내포한다. 비키 커비의 말을 빌려 모든 비/유기체는 자신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써 내려가고, 인간의 인지와 무관하게 모든 것은 글을 쓰는 중이다. 한 장의 땅이, 다른 한 장의 땅과 겹쳐서 써 내려 간 잠시 동안의 기록에 대해 쓰이는 지금 이 글과 같이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 사진과 땅은 그들의 방식으로 텍스트를 써 내려 간다. 그것은 따로 쓰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쓰는 일에 가깝다. 우리가 그들에 대해 쓰고 있듯 그들이 지금 우리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