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조건과 비범한 이미지에 대한 단상들

김성우 (큐레이팅, 독립큐레이터)

#1 일상의 질서로부터 사각, 뒤편, 이면에 이르기까지
처음 그녀의 작업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정확히 어떤 자리에서 어떤 기회로 보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떠오르진 않지만, 사진작가로서 그녀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이 눈길을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칠게,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그때 나는 박희자의 어떤 작업을 보았고, 피사체의 조형성이나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이미지를 구조화한 방식에 묘한 흥미를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인상은 빼어난 사진 기술로 피사체를 캐치한 표피적 차원의 시각적 흥미로움 탓이라기보다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 위치하는 등장인물들(인물에서부터 사물, 그리고 그것이 놓인 공간에 이르기까지)이 만들어내는 어떤 긴장에서 기인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해당 작업이 (2015-2016) 시리즈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술 대학을 대상으로 한 본 작업에서 그녀는 심리적 차원에서 눈길이 잘 닿지 않는 어떤 공간의 ‘틈새와 사각’, 또는 사건의 ‘뒤편’이나 사물의 ’이면’을 주목하고 있다. 이를테면, 작가는 산만하게 (하지만 어쩌면 사용자가 가장 편리하게 의도적으로 정리해 놓은 듯한) 널브러진 의자와 캔버스, 아마도 조각 작업 등에서나 쓰였을 법한 석고 포대와 이들이 어떤 편의에 따라 공간에 놓인 상태를 촬영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회화 작업 이후 작업이 사라진 가벽 위로 남겨진 물감 자국 같은 것을 포착하기도 한다. 포커스가 사물만을 향해 있든, 혹은 조금 더 공간적인 차원에서 상황을 담아내든 대체로 그들은 그리 주목하기 어려운 ‘일상의 질서’에 속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저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이 걸어놓은 옷가지라든가, 어제의 시간을 잠시 상기시킬만한 와인잔, 기껏해야 어쩌면 재료로 사용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자연스러운, 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작업실(예술대학)에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창작자의 시간과 노동을 오롯이 반영하는 것이 작품이라면, 이들은 그와는 꽤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본 시리즈에서 인물을 담아낸 사진을 보더라도 외모나 표정같이 극적인 것을 취하지 않기에 모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을 연상하긴 어려우며, 그저 수줍은 듯 과격하지 않은 포즈와 의상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어떤 무드나 인상 정도에 머무른다. 이렇듯 시리즈를 장식하는 일련의 작품을 펼쳐놓고 보자면, 예술 대학이라는 공간에 대한 정보 없이는 ‘예술’과는 무관해 보인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는 꽤 흥미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전통적으로 예술적이기 어려운 존재들을 예술-사진의 사각에 틀지음으로 과연 오늘날의 ‘예술’이란 무엇으로부터 정의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상기하게도 하며, 예술을 둘러싼 시공에 존재하지만, 예술을 지시하지 않는 대상들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예술이라는 창작의 과정 안에 존재하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를 마주하게도 한다.

#2 현재의 표면 - 사물의 기능과 가치가 전복되어 말해주는 풍경
박희자는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작가’와 ‘작품’에 거대한 환영을 부여하기 위한 대상을 탐색하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평범한 조건과 환경을 비범한 구도로 포착해낸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은 앞선 예술 학교에서 을지로로 옮겨간다. 과거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공구상과 기술자들 중심이었던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은 작가로서 자주 드나들던 익숙한 지역의 풍경이자, 지금은 현실의 속도에 뒤처져 쇠퇴한 모습이 되어버린 곳이다. 또한 쓸모에 따라 기능을 갖고 계속해서 갱신되는 가치와 효용이 다해 재고로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가치가 공존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작가는 <사물이탈-경치의 오브제>(2018)에서 이 쓸모와 쓸모없음이 양립함으로 가능해지는 어떤 조형적 순간을 탐색한다. 예를 들면 가게 앞에 놓인 화분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 잡은(혹은 버려진) 각목 조각들, 카트 위에 엉뚱하게 걸쳐진 형광등, 셔터가 내려간 상점 앞 푸른 천막으로 거칠게나마 가려져 영역을 공고히 하고있는 어떤 사물들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을지로라는 지역의 현재 시간의 표피이자, 내밀하게 축적된 개인의 역사를 가장 잘 담아내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가 기존에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형식과는 사뭇 다르기에 특징적으로 와닿지 못한 어떤 모습이며, 그렇기에 이곳을 가장 잘 묘사하는 조형적인 형상일 것이다. 그리고 애초 기존의 기능이나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이 구조가 곧 이 지역의 풍경이 가진 지금의 색깔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출발선에서, 하지만 이 사물을 보다 예술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실험을 감행한다. <사물이탈-art Things>(2018)에서 박희자는 을지로를 돌며 철망이나 타일, 아크릴 조각에서 절단된 금속 프레임에 이르기까지 버려진 것들을 수집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집이 아니라 재구성의 원리이다. 작가는 수집된 오브제를 기존의 용도나 기능의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탈구시키고, 그것들의 재질, 색깔, 형태를 바탕으로 새로운 조형적 미를 창출하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작가는 작품의 제목에서 밝히듯, 즉 사물의 영문 앞글자를 대문자(‘T’hings)로, 예술의 영문 첫 글자를 소문자(‘a’rt)로 표기하듯, 예술을 위해 도용된 사물이 아닌, 시간의 흐름과 모종의 사연을 머금은 각 사물 자체를 예술적 가능성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사물’과 ‘예술’의 줄다리기는 곧 기술자의 ‘제작’과 작가의 ‘창작’의 위상을 뒤틀고 전복하며, 그 경계에 대해 비판적 사유를 가능케 한다.

#3 사물을 다루는 매체적 환경 - 물리적 공간에서 디지털 환경까지
기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그 수명이 다하는 순간 보통은 가차 없이 버려지곤 하지만, 시간과 공간, 그리고 거기에 연루된 모든 사건까지 얇은 평면으로 압축, 이미지화해버리는 사진은 한정된 생애주기로부터 저항하는 기록 매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눈길 받을 일 없이 보잘것없던 존재가 기록의 대상이 되고, 사건의 주체가 되며, 서사의 중심에서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물은 더는 수동적으로 놓인 대상이 아닌, 스스로 거기 있음을 진술하는 증거이며, 실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박희자는 이러한 사진의 본성에 질문을 더한다. ‘그저 찍힌다는 것으로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 것인가?’라는 그녀의 내적 고민은 곧 작품 창작의 전후에서 절대적 주체인 작가 외에 또 다른 타자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허락한다. <사물이탈-퍼포머>(2018-2019)에서 박희자는 자신이 각색한 작가와 사물, 사물과 사물간의 관계에 또 다른 타자의 개입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촬영을 위해 일반적 사물은 특별한 피사체가 되고, 그 과정에서 작가의 시선에 따른 조합과 구성의 절차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며, 사진으로 기록됨으로 사물의 여정은 멈추게 된다. 하지만 이후 그녀는 피사체가된 사물에 대한 인상을 퍼포머로 하여금 신체적으로 해석하게 함으로써 멈춰진 사물의 서사에 다른 층위의 호흡을 허락하고 다시금 생동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가장 최근의 작품 <탄생스튜디오>(2019)는 사진 스튜디오의 이미지를 월페이퍼 형식으로 출력하여 벽면에 도배함으로 마치 전시장에 스튜디오를 이식한 듯한 환경을 만들고, 그 위에 퍼포머의 연속된 움직임을 360도로 촬영한 이미지와 실재 사물을 평면으로 기록한 후 다시 3D VR 기술을 통해 입체화한 작업을 병치한다. 이로써 작가는 평면의 이미지로 환원된 실재의 환경(혹은 사물), 그리고 다시 퍼포머를 통해 해석된 피사체의 인식 변환, 거기에 더해 전시라는 물리적 환경에서 이미지를 해석하는 방식과 디지털 환경이 변화시킨 사용자 감각의 확장 및 축소와 같은 인식에 대한 논의를 작업으로 끌어오게 된다. 또한 동시대 디지털 디스플레이의 발전과 함께 아주 가볍게 유통, 소비되는 납작한 물질-이미지가 되어버린 작품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의미의 생산을 과거와 같이(혹은 다르게)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마주하게도 한다.

#4 일상의 조건을 흔드는 비범한 이미지들
박희자의 사진은 보통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것을 포커스의 가운데로 위치시키기에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수반하며 그다음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기본적으로 사진작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충실한 반영은 이미지 그 자체, 이미지를 담거나 이미지가 담아내는 물질 사이의 관계에 대해 충분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곧 자신의 삶을 구조화하는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여 일상의 질서를 뒷받침하지만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들로 이어지고, 현재의 풍경을 구축하는 조형적 질서를 탐구하며, 이미지를 다루는 매체와 환경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업에서는 사진과 그것을 담는 액자의 지위가 전복되기도 하며, ‘제작’과 ‘창작’의 경계가 흐려진다. 그리고 명명되지 못했던 사물은 이름을 얻고, 미처 시선이 닿지 않아 죽어있던 공간-사각은 장소가 되며,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하던 일상은 사건이 된다. 그렇게 일상의 조건(사물, 공간, 시간, 환경)은 그저 그렇게 존재하던 것에서 적극적으로 시공을 점유하며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상의 일상적 지위가 보잘것없을수록 예술에서 그것이 갖는 전복적 가치는 증가하고, 결국 우리가 마땅히 해오던 사고와 인식의 틀에는 균열이 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